엘더스크롤 시리즈는 무려 1994년에 출시한 1편을 시작으로, 2011년 출시한 ‘엘더스크롤 5: 스카이림’에 이르기까지, 판타지 RPG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시리즈입니다. 여러분이 플레이하고 계실 ‘엘더스크롤 온라인’은 그 시리즈를 온라인화 시킨 것으로, 엄밀히 말해 외전에 해당합니다.
모름지기 대작 RPG라고 하면, 디테일하면서도 독자적인 세계관과 설정, 다시 말해 ‘로어’를 갖추고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엘더스크롤 시리즈는 이러한 대작 목록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만큼, 당연히 매우 심도 있고 방대한 세계관을 갖추고 있습니다. 물론 꼭 이를 알아야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로어로 인해 게임을 더 깊게 파헤칠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자, 이렇게 호기롭게 운을 뗐지만, 엘더스크롤 시리즈의 로어는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을 정도로 복잡합니다. 이는 후술할 두 가지 특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1. 현실세계의 전승과 문화 양식의 철저한 반영과 거기서 오는 방대함
엘더스크롤 시리즈는 현실을 배경으로 하지 않는 ‘하이 판타지’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문화 양식을 심도 있게 반영하기로 유명합니다. 이러한 기조는 개발진 테드 피터슨으로부터 시작해서, 게임 디자이너 켄 롤스턴의 ‘(게임 내) 모든 것은 일종의 메타포로서 작용해야 한다’라는 원칙을 거쳐, 최신 작품인 엘더스크롤 온라인에 이르러서는 더욱 극대화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게임을 조금만 살펴 보아도, 건축, 복장, 인물 양식 등이 현실의 어떤 점과 닮았는지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중동, 아랍 양식의 레드가드와 그들이 거주하는 해머펠 지역, 중세 유럽의 양식을 갖춘 브레튼과 하이 락 지역, 고대 로마 풍이 짙은 시로딜, 대놓고 일본풍의 요소로 범벅된 아카비리 등이 그렇습니다. 물론 그러면서도 다른 문화 양식들을 교묘히 섞어서, ‘중동=레드가드’, ‘로마=시로딜’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게끔 설계 해 놓았지요.
그렇기에 엘더스크롤 시리즈의 로어는 현실의 문화/신화가 그러하듯, 무진장 방대합니다. 엘더스크롤 시리즈의 주 무대인 탐리엘(Tamriel) 대륙만 놓고 보아도 그런데, 설정상으로는 탐리엘 밖에 멀쩡히 존재하는 다른 대륙이 3개, 과거엔 5개나 더 있었기 때문입니다. 막상 게임에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수많은 종족들과 나라들에 대한 설정들이 존재하며, 아예 대륙 전체가 시간을 건너뛰거나, 다수의 평행 세계가 모두 현실이 되어버리는 사건까지 일어납니다. 심지어 이 설정의 범위는 탐리엘 대륙이 속한 넌(Nirn) 행성을 넘어, 그 행성이 속한 문두스(Mundus) 차원, 또 그 우주들이 겹쳐진 오르비스(Aurbis)라는 다중차원까지 포함합니다.
2. ‘믿을 수 없는 화자 (Unreliable narrator)’ 기법의 적극적인 활용
이렇게 방대한데도 불구하고, 엘더스크롤 시리즈는 사실 ‘공식 설정이 없는’ 게임입니다. 엘더스크롤 로어의 대부분은 게임 속 서적이나 npc의 설명, 내지는 플레이어가 직접 겪은 일들을 통해 제공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전술했던 넌 행성, 문두스와 오르비스 같은 다중 차원에 대한 설정도 제작진에 의해 직접 소개되기보다는, 게임 내 특정 학자들(예를 들어 메이지 길드의 일원들)이 저술한 이러저러한 가설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한가 싶으시겠지만, 이는 방금 이야기한 현실 문화의 철저한 반영이라는 특성과 어우러져, 어떠한 설정이 특정 종족 내지 특정 세력의 관점에서 서술되었음을, 따라서 왜곡의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러한 설정에 반대되는 다른 설정이, 다른 세력의 관점에서 또 제공되고 있음을 시사하지요. 한마디로 로어 안에 서로 모순되는 서술이 매우 많이 존재하며, 우리는 그 중 어떤 것이 진짜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단적인 예로, ‘로칸’이라는 신에 대한 로어가 있다고 칩시다. 사실 로칸이라는 이름부터가 엘프(-mer)들이 부르는 것이고, 인간(man)들은 각각 다른 이름으로 이 신을 부릅니다. 예를 들어 스카이림의 노드들은 ‘쇼어’, 시로딜에서는 ‘쉐자르’, 하이 락에서는 ‘쉐오어’, 해머펠에서는 ‘셉’ 등등…. 그리고 엘프들은 로칸을, 본디 신이었던 자신들에게서 불멸성을 훔쳐 간 악신으로 보는 반면에, 인간들은 로칸이 그들을 직접 창조했다고 믿습니다. 이는 곧 대다수의 엘프들(특히 알트머들)은 스스로를 ‘신의 후손’으로 여기고, 부당하게 불멸성을 빼앗긴 채 필멸자가 되어 버렸다고 여기는 데 반해, 인간은 스스로를 신의 ‘피조물’이라 여기고, 그렇기에 신과 인간 사이에 엄격한 위계를 둔다는 사상적 차이로 이어집니다. 로칸이 어떻게 필멸자를 생성/창조했는지, 또 로칸이 어떤 식으로 죽음을 맞았는지, 그 후 로칸의 육신은 어떻게 되었는지 등, 이 많은 요소들에 대해, 게임 내 서적은 서로 상반되는 단서들만 던져주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정말 로칸이 어떤 존재인지 공식적으로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화자가 제시하는 서술이나 상황에 대한 평가를 독자가 신뢰할 수 없는 경우’를 문학이론에서는 ‘믿을 수 없는 화자(Unreliable narrator)’라는 용어로 부르는 것으로 압니다. 즉 엘더스크롤 시리즈는 이 믿을 수 없는 화자 기법을 적극 활용하는 RPG인 셈입니다.
자, 이로써 엘더스크롤 시리즈의 로어를 소개하기 위한 사전 준비는 대략 끝난 것 같습니다. 쓰고 보니 부정적인 이야기만 잔뜩 한 것 같네요. 너무 많고, 그걸 검증하기 위한 자료는 모순되는 게 많으며, 제작진은 공식적으로 어떤 게 정설이라고 말해 주지도 않는다. 허나 그렇기 때문에 게임 내에 세밀하게 녹아든 로어의 흔적을 찾는 일은 무척이나 즐겁습니다.
개인적으로 우리 나라의 RPG 문화는 해외의 그것과 비교할 때, 매우 성과 중심적이 되고 있다고 느낍니다. 높은 DPS나 아이템 같은 성과를 지향하는 것 자체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너무 과도하게 그것만 추구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엄연히 ‘롤 플레잉 게임’인데도 불구하고 롤 플레잉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요. 도리어 그런 식으로 캐릭터의 배경 설정을 만들고, 거기 입각한 플레이를 하고 있으면 ‘과몰입한다’ 내지는 ‘오글거린다’는 소리를 듣기 일쑤입니다. 반면 해외 유저들 사이에서는 철저하게 핍진성을 따지는 롤 플레잉이 꽤 흥하고 있고, 심지어 그러한 플레이를 위한 ‘RP 서버’가 따로 존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한 서버에서는 반드시 세계관에 어울리는 캐릭터명으로 캐릭터를 생성해야만 하며, 대부분의 유저들이 (현실에서 그렇듯) 뛰지 않고 걸어 다니고, 전체 채팅 내지 지역 채팅을 지양하는 식입니다. 이는 테이블 앞에 모여 앉아 오직 주사위와 대화만으로 각자가 분담된 역할을 상상/연기하는 TRPG(Table-talk Role Playing Game), 그리고 그것이 흥했던 분위기와도 연관이 있겠지요.
이렇게 운을 띄웠으니, 앞으로 한가해질 때마다 제가 아는 엘더스크롤 로어를 조금씩 소개해 볼까 합니다. 해서 이런 점을 몰랐는데 새삼 알게 되었고, 그래서 더 재미있어졌어요 – 같은 반응이 나오면 더할 나위 없이 뿌듯하지 않을까 싶네요.